C.S. Lewis <고통의 문제>

DRESSED IN JESUS


피조물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자기 자신을 자아로 인식하는 순간, 하나님을 자기의 중심으로 택하느냐 자아를 중심으로 택하느냐 하는 무서운 양자택일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련된 사람들 뿐 아니라 어린아이나 무식한 농부들도 매일 짓는 죄이며,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홀로 떨어져 사는 사람들도 매일 짓는 죄입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의 삶에 나타나는 타락으로서, 모든 개별적인 죄들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죄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여러분과 저는 이 죄를 짓고 있거나, 막 지으려고 하고 있거나, 이 죄 지은 것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새로 맞이한 하루를 하나님의 발 아래 내려놓고자 합니다. 그러나 면도를 채 끝내기도 전에 그날은 "내" 날이 되어 버리고, 하루 중 하나님께 드리는 몫은 마치 "내" 지갑에서 꺼내 드리는 세금이나 마땅히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에서 공제해 드리는 부분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개선될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John Henry Newman의 말처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할 반역자들입니다.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말은 그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때 그야말로 무서운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 경우 하나님은 우리에게 방해거리로 등장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디선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하시지만 우리 손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주지 못하십니다.” 또는 제 친구 한 사람의 말처럼 “우리는 비행기 조종사가 낙하산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합니다. 위기 상황에 대비해 마련해 두긴 하지만, 그것을 사용해야 할 기회는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을 아시며, 우리의 행복이 바로 그분 안에 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복을 찾을 만하게 보이는 곳을 단 한 군데만 남겨 두셔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나의 삶’이 즐겁게 느껴질 동안에는 그 삶을 하나님께 양도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덜 즐겁게 만들고 그럴듯해 보이는 거짓된 행복의 원천을 빼앗는 것 외에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 자리, 처음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잔인하기 짝이 없게 보이는 이 자리야 말로 하나님의 겸손함과 지고한 분의 낮아짐을 찬양해 마지않아야 할 자리입니다.

따라서 왜 우리의 치료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느냐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 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통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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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꽂습니다.


아마도 3~4번 째 읽고 있는 것 같다. 20대 초반, 중반, 그리고 후반. 때마다 꺼내어 읽게 되었던 루이스의 글들.

마냥 흘러가는 행복 속에 있던 때는 모든게 가리워져 제대로 볼 수 없던 것들을 고통 가운데 거할 때 비로소 눈 뜨고 볼 수 있게 해주신다.

죽기보다 싫다고 소리질렀던 그 시간이 결국 감사의 고백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의지를 쥐어 짜내 뱉어냈던 신음은 이렇게 소리없으면서도 엄숙하게 내 삶을 타고 흐르고 있다.

로마서 7장 말미에 기록된 바울의 고백처럼.. 죄와 사망의 몸에 속한 이 곤고한 몸부림이 언제 끝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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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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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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