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Lewis <헤아려 본 슬픔>

DRESSED IN JESUS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렇게 묻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증상이다. 행복할 때는 행복에 겨워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 행복해서 그분이 우리를 주장하시는 게 간섭으로 여겨지기조차 하는 그 때, 우리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면 두 팔 벌려 환영받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러고 나서는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점 없다. 빈집인지도 모른다. 누가 살고 있기나 했던가? 한때는 그렇게 보였다. 그때는 꼭 누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정말 빈집 같다. 지금 그분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게임에 돈을 걸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게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명 이와 같다. 하나님이든 아니든, 선한 신이든 우주의 가학적 신이든, 영생이든 비존재든, 그에게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진지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판돈이 엄청나게 높아져 마침내는 가짜 돈이나 푼돈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순간이 되어서야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한 사태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H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올바른 영혼을 지녔으며 영민하고 칼과 같이 벼려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성인은 아니었다. 죄 많은 남자와 결혼한 죄 많은 여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많은 환자들 중 하나였고, 아직까지 치유받지 못한 남녀들이었다. 거기엔 닦아 주어야 할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박박 닦아 내야 할 얼룩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 칼은 더욱더 빛나게 벼려져야 한다.

사랑이 클수록 슬픔도 크며, 믿음이 깊을수록 사탄은 더 가혹하게 그 성채를 할퀸다.


재독,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나의 사랑하는 스승 루이스의 렌즈로 바라본 사랑과 사별.

둔감한 나의 마음으로는 인지하고 해설할 수 없던 아픔의 전류를 루이스는 명징하게 이해하고 풀어낸다.

그가 남긴 글자의 발자욱을 따라 걷다보면 그 곳엔 눈물이 흐르기도, 아픔의 근원이 있기도, 뜻밖의 환희가 있기도 했다.


찢긴 마음이 아침 여명 아래 소리없이 춤추는 들풀처럼 초연하고 담대해질 때 까지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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